임프린팅: 오늘의 기원을 여태 상상하고, 모레의 흔적을 벌써 쓰는 일   

멀리서 바라본 신지선에 대한 단편적 인상은 고현학자 혹은 도시인류학자의 기풍이다.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의 작업들이 참여관찰법을 비롯하여 구술 인터뷰와 같은 인류학적 방법론을 채택했기 때문일까. 그만의 면밀한 조사와 작가적 연구는 삶과 장소, 존재를 둘러싼 주제적 보편성과 그로 인한 뭉툭함을 특수한 세계로 좁혀 들어가는 세공 방식처럼 보인다. 

지난 해 선보였던 개인전 <눈의 소리>는 특히 그러한 확증 편향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방대한 분량의 문헌 연구를 통해 수집된 상징적 이미지와 텍스트, 그리고 실증적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구술 채록 자료들로 채워진 출판물은 도록이기보다는 재야 학자의 자기연구서처럼 보인다. 결국, 작가의 눈 속에 포박된 ‘눈’이 표상하는 세계에 관한 고찰은 집중해야 할 대상을 배경으로부터 박리하고, 되살리고자 하는 풍경과 사물의 질서를 재편하며, 슬며시 달아나는 지금의 순간을 붙들고 있는 작가적 삶에 대한 자기 응시의 행위일 것이다.     

서로 배치되어 보이는 것들 사이의 과감한 맞댐과 그로 인해 도드라져 보이는 역설의 파장은 예리하게 마음을 겨냥한다. 작가의 작업이 그렇다. 그가 초기부터 최근까지 시도해 온 다양한 방식의 작업들은 물론 그때마다의 관심사와 미술계의 요구, 해법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는 사회화된 자연과 자연화된 인공물처럼 동시작동하기 어려운 것들 사이의 어색한 공존 상태를 ‘고현’(考現, 현상을 살핌)하는 것에 있어 보였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천연덕스럽고,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며, 이따금 풍자와 우화에 수렴해 간다. 그 과정에서 우선은 성실한 이야기 청취자/수집가가 되어야만 했을 것이고, 이윽고 자신만의 어법을 구사하는 이야기꾼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최근의 작업은 표면적인 층위에서 ‘꽃’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고, 주제의 심층부에서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초유의 환경적 위기에 처한 인류세와 같은 거대담론으로 뻗어있는 모양새다. 과거의 작업 <지역의 상징 해석에 대한 자연관찰>(2015)에서부터 새와 꽃, 나무에 대한 자연철학적 관심과 작가적 지식을 이미 드러낸 바 있다. 인간의 시선과 환경 지식에 따라 ‘자연’이 ‘자연화’되는 과정을 작가적 관점에서 재조사한 작업이다. 그런가 하면, 바로 같은 해의 작업인 <나무제례>나 <공장나무>는 도시환경과 그럭저럭 공존하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일상의 풍경들, 경우에 따라 매우 ‘비자연’의 상태에 놓인 자연생태에 대한 고찰을 잘 보여준다. 인간 외적 존재에 대한 문화적 소비와 유지의 습속이 그가 기록한 사진과 영상에 드러나 있다. 

한편 <스트리크노스 엘렉트리(Strychnos electri)>(2016)와 같은 작업은 작가가 사유하는 시간성의 범위가 저 멀리 확장된 것처럼 보인다. 무려 삼천 만 년 전에 화석화된 호박꽃의 흔적은 명백한 과학적 표본이지만, 오직 상상력을 통해 원시의 공간에 존재했을 생명체의 성장과 향기, 움직임과 같은 정보를 더하여 상상해본다. ‘화석’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과거 한 시점에 대한 ‘임프린트(imprint)’로, 진공 속의 압인처럼 보이는 그 건조함 안에도 생명의 운반과 퇴적, 유실과 경화와 같은 다양한 변화의 사투로 가득 들어차 있음을 짐작해 보게 된다.  

병균처럼 급속하게 퍼진 불안함을 애써 견뎌오며 작가는 올 한 해 난지 작업실에서 <Flowers>(2020~)시리즈를 재개하였다. 과거 한 동안 대규모 생활쓰레기 매립지였던 곳에서 다양한 식물군락으로 조성되어 공원지대로 탈바꿈한 공간 위에 책상을 두고 앉아, 진지하게 식물의 기원 지점을 연구하는 풍경은 퍽 매력적인 아이러니다. 작가는 도시인류학자에서 어느새 고대식물학자가 된 것 같다. 


인터넷과 문헌 자료를 끌어 모아 작가가 연구하고 있는 꽃은 에완투스패니(Euanthus panii), 몬체치아 비달리 (Montsechia vidalii), 난징안투스덴드로스틸라(Nanjinganthus dendrostyla) 등과 같은 중생대 식물 종을 포함한다.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꾸고 소비하는 꽃식물의 기원이 대략 일억 년 전이라는 사실은 낯설다. 화석 속의 흔적을 통해 이루어진 꽃과의 대면이란 이를테면 훗날 누군가가 화석을 통해 조우하게 될 지금의 인류, 강아지와 고양이, 핸드폰과 랩톱과 같은 불편한 상상력을 촉발한다. 어떤 것이든 화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가 인류세의 문제를 언급함에 있어 수천만 년 전의 생물, 그 중에서도  ‘꽃’ 화석을 다시금 꺼내든 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보기에 따라 식물의 생식기관에 해당하는 ‘꽃’은 거대 자연을 상징하는 작은 제유이자 아름다움이나 꾸밈과 같은 여성형의 문화적 함의를 갖는다. 그것들은 때로 생명체의 볼륨과 구조를 거세당한 장식 도안과 패턴으로 존재하며, 수천, 수만 송이를 짜내 얻은 호사스러운 향기로써 소비되었고, 온갖 축하와 추념을 위한 의례의 시간 속에 익숙하게 자리해 온 정물이었다. 인간 욕망이 투영된 고전적 이미저리로서 꽃이 있다면, 그가 꽃을 불러낸 방식은 플라스틱 수지를 사출하여 굳히는 방식의 3D 프린팅 기술이다. 화석의 생성 방식과는 정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식물이 남긴 지질학적 흔적을 위상학적 데이터로 치환하여 형태의 속살을 채워나가는 방식은 동시대 작가들이 구사하는 조각의 언어가 되었고, 여러 단계를 거치며 존재의 전치(轉置)가 일어난 꽃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과거에의 기록이 아닌 현재적 응수와 미래로의 경고를 택하고 있다. 먼 훗날 인류가 쌓아놓은 지층 안에 절대적 양으로 파묻혀 있을 플라스틱 더미와 시간이 지나도 도통 썩을 것 같지 않을 인공 물질들을 상상해 본다. 한 해에 전 인류가 먹어 치우는 오백억 마리의 닭 뼈가 풍화되어 지층의 아래로 가라앉고, 우연한 과정을 통해 화석이 되는 동안 끝끝내 살아남아 있을 카페의 가짜 활엽수들, 공원 묘지를 장식하는 요란한 컬러의 조화 다발을 떠올려 본다.  

허공 속에 작가가 피우고자 했던 것은 어제의 꽃 조각이 아니라, 내일이면 흩어져 버릴 꽃의 향기와 꽃봉오리 속 여린 수술의 진동, 시간과 장소를 매개로 전달되는 생명의 기운 그리고 온 존재에 대한 ‘임프린팅’일 것이다. 오늘의 기원을 여태 상상하고, 모레의 흔적을 벌써 써 내려가는 그런 일일 것이다. 

 

조주리 (전시 기획, 비평)